수진 씨(가명)는 달력을 넘기다 우연히 그 날짜를 봤다. 결혼기념일이었다.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알람도 안 맞춰뒀고, 달력에 표시도 안 해뒀다. 삼십 년 가까이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유독 마음이 무거웠다. 순간 뭔가 뜨끔했다. 신혼 때는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날짜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남편에게 물어봤다. "우리 결혼기념일 지난 거 알았어?" 남편은 잠깐 생각하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어, 몰랐네. 미안." 그 말이 서운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도 몰랐다는 사실이 더 씁쓸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신혼 때는 그날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설렜다. 남편이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기도 했고, 근사한 레스토랑까진 아니어도 둘이 좋아하는 국밥집에서 소주 한잔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자라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결혼기념일은 조금씩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 무렵엔 아이 생일, 학부모 상담, 학원 스케줄 같은 것들이 달력을 가득 채웠다. 딸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 챙기느라 본인들 챙기는 걸 너무 잊고 사는 것 같아."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딸의 말이 맞았다. 부부만의 날짜는 거기서 자연스럽게 지워졌다. 밥벌이도 육아도 정신없이 흘러가던 그 시절엔, "올해는 그냥 넘어가자"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처음엔 미안한 마음이라도 있었는데, 몇 년 반복되니 그 미안함마저 흐려졌다.
수진 씨는 그날 밤, 인터넷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봤다. 결혼기념일을 신혼 때만 챙기다 언젠가부터 잊어버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중 한 댓글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나이가 오십이 넘어도, 여전히 그런 서운함은 쌓인다는 말이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안 챙기기로 하고 시작해서 서로 편하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자기만 챙기고 상대는 매번 까먹어서 속상하다고 했다.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수진 씨는 그 문장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이벤트를 바란 게 아니었다. 그냥 그날을 함께 기억해주는 것, 그 자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조금 쑥스러웠다. 삼십 년 가까이 산 부부 사이에 이제 와서 "다시 챙기자"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대로 계속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날 저녁, 수진 씨는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다시 좀 챙겨볼까. 거창하게 말고." 남편은 의외로 순순히 동의했다. "그러게,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처음엔 남편도 "뭘 그런 걸 굳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수진 씨가 "그냥 한 시간이면 돼, 밥 한 끼만 같이 먹자는 거야"라고 하자,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결국 그 자리에서 작은 약속 하나를 정했다. 앞으로 매년 결혼기념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한 끼만큼은 꼭 둘이서 먹기로 한 것이다. 선물은 굳이 부담 갖지 말고, 대신 그해 있었던 일들을 서로에게 차분히 이야기해주기로 했다.
이듬해 결혼기념일, 두 사람은 신혼 때 자주 가던 그 국밥집을 다시 찾았다. 가게는 많이 낡아 있었고, 주인 얼굴도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대화는 오랜만에 느긋했다. 처음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침묵도 흘렀다. 하지만 국밥 한 그릇이 반쯤 비워질 때쯤,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아이 이야기도, 집안 걱정도 잠시 미뤄두고, 그저 그해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다. 남편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문득 말했다. "우리 결혼할 때, 이렇게 늙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수진 씨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그때 참 어렸었지."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월이 그렇게 야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편이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 앉아서 얘기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수진 씨도 같은 마음이었다. 결혼기념일이라는 이름을 다시 붙였을 뿐인데, 그 하루가 두 사람에게 완전히 다른 온도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매해 그 저녁 자리를 지켰다. 화려하지 않아도, 그 하루만큼은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처음 몇 번은 서로 날짜를 깜빡할까 봐 일부러 캘린더 앱에 알림까지 맞춰뒀다. 몇 년이 지나자 그런 장치 없이도 자연스럽게 그날이 다가오면 서로 먼저 얘기를 꺼내게 됐다. 수진 씨는 그 대화들 속에서 그제야 깨달았다. 결혼기념일을 챙긴다는 건 거창한 이벤트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저 잠시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었다는 것을. 살다 보면 부부의 날짜는 아이의 날짜에, 집안의 크고 작은 날짜에 자연스럽게 밀려나기 마련이다. 아이가 자라서 독립하고 나면 다시 시간이 날 줄 알았는데, 막상 그때가 되니 이번엔 서로 그 여백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결혼기념일을 다시 챙기기로 한 건, 어쩌면 그 막막함에 작은 답 하나를 찾은 셈이기도 했다. 수진 씨 부부의 이야기는 특별할 것 없는, 아주 흔한 이야기다. 그러니 어쩌면 정말 중요한 건 한 번도 안 잊는 것이 아니라, 잊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다시 챙기기로 마음먹는 바로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자주 묻는 질문
Q. 중년 부부가 결혼기념일을 안 챙기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녀 양육과 생계에 치이면서 부부만의 날짜가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습관이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Q. 결혼기념일을 다시 챙기려면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거창한 이벤트보다 부담 없이 함께 식사하며 그해 있었던 일을 나누는 것처럼, 작고 지속 가능한 약속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Q.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부부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특별한 선물이나 행사보다, 잠시 멈춰 서서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이 글은 이해를 돕기 위해 구성한 가상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일반적인 정보이며, 전문 상담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블로그 면책사항 페이지를 참고해 주세요.